스케이터로서 커리어가 끝난 뒤의 삶

스케이터로서 커리어를 시작한다. 그리고 끝난다. 어떤 사람은 곧장 스케이트보드 업계에서 일을 시작한다. 어떤 사람은.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택이든 아니면 쫓겨났든) 스케이터 커리어가 끝나고 “진짜 세상”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어떤 것일지 전혀 알지 못하고 생각도 하지 않는다.

난 가난했다. 왼쪽 발목 인대가 찢어졌다. Foundation의 다음 영상을 찍지 못하고 West Hollywood 집의 소파에 앉아서 맥주나 빨고 있었다.

현실을 직시해야만 하는 시점이었다.

한때 난 운 좋은 놈이었다. 20대에 스케이트보드를 커리어로 삼을 수 있었고, 제일 좋아하는 스케이터들과 투어를 다니고 같이 살기도 했고, 한 번도 직장을 다닌 적도 없었다.

그러나 긴 부상 때문에 보드를 안 타는 시간이 늘어갔고,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상황에 이르게 됐다. 앞으로 뭘 하며 살아야 할지 고민할 때가 된 것이다. 난 그 생각을 하기도 싫었다. 몇 년 동안 날 괴롭혀온 고민이었고, 항상 먼 미래의 일 같았다. 나중에 때가 되면 다 해결되리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Thrasher에 실린 19살 당시의 나 – bs smith  /  photo: sean cronan

 

스케이팅이란 참 특별하다. 고등학교에서 시키는 다른 흔한 운동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제외되고, 아웃사이더가 되는 것에 적응하게 된다. 그게 편안해지고, 자부심도 갖는다. 우리 아이덴티티가 돼서, 앞으로 그렇게 살게 되는 것이다.

고향 Connecticut에 돌아와서, 스폰서를 다 그만두고, 꿈을 접고, 이 세상 어디에 내가 맞을지 알아내려고 하는 신세가 된 기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난 평생 보드 타는 것밖에 몰랐는데.

난 한 번도 제대로 된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출근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다. Steamer, Ellington, Shane Heyl, Maldonado, 그리고 놀러 온 친구들이랑 같이 사는 Huntington Beach의 Warner Mob의 멤버였다. Piss Drunx로 한창 활동할 때였다. 말도 안 되게 멋있고, 건강하지 않은 삶이었다.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을 박스에 가둘 수 없었다. 새벽 3시에 눈을 술병과 함께 눈을 뜨는 게 일상이었고, 숙취에 시달리지 않을 정도로 젊었다. Hollywood로 이사 가서는 더 거칠게 놀았다.

그렇게 살면서 보드로 생산적인 일을 하지 못한다면, 그건 그냥 쓰레기인 거다. 지금도 그걸 알지만, 사실 그때도 그걸 알았다. 그래서 어떤 날에는 거울을 보고, 거울에 비친 쓰레기를 보고, 내 존재를 마주해야만 했었다.

 

친구들: hane Heyl, Elissa Steamer, Mike Maldonado, Erik Ellington, Mark Waters 등

 

그때 이후로 난 Connecticut에 있는 엄마 집으로 돌아갔다. 이제부터 뭘 해야 할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할 줄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발이 조금씩 낫고 있었기 때문에 가끔 보드를 탔지만, 그걸 이력서에 쓸 순 없으니.

원래 알고 있던 삶으로 되돌아가면서, 계속 지연됐다. 보드를 타고, 파티를 하고, 친구들과 노는 게 먼저가 된 것이다. 도저히 좆같은 다른 삶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다른 삶이 뭐길래? 주유소에서 일하는 거? 창고에서 시멘트 나르는 거? 사무용품 가게에서 물건 파는 거?

그랬다.

스케이트보드 업계에서 먹고살다가 나온 많은 사람들은 사회의 밑바닥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이 사회에 제공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학위도 없다. 문법에 맞춰 글을 쓰지도 못한다. 우린 우리만의 언어를 썼다. 여가 시간을 쓰는 방법도 달랐다. 다 좆까라고 살았다.

하지만 이제 난 혼자였다. 표정 관리도 해야 하고,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난 그저 조용하고, 불안정하고, 보드 이야기가 아니면 누구랑 이야기하기도 꺼려지는 사람이었다.

“24살이 됐고, 삶에서 뒤쳐졌다. 밑바닥 인생이었으니까, 밑바닥에서 시작할 수밖에 했다.”

 

난 밑바닥 인생이었으니까, 밑바닥에서 시작할 수밖에 했다. 주유소 알바, 창고에서 짐꾼, 86년식 Chevy Corsica 운전사를 했다. 집에 있는 등유 난로에서는 밤마다 검은색 연기가 나왔고 피부가 녹색이 됐다. 최저임금을 받았다.

밑바닥.

24살이었고, 삶에서 뒤처졌다. 스케이트보드를 내 인생의 일부로 삼겠다는 걸 후회한 적은 없지만,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 남들보다 두 배로 열심히 일해야만 했다. 창밖에서 트럭 운전수가 오랄 섹스하는 풍경이 일상인 New Haven 빈민가에서 싸구려 술을 마시면서, 히터도 안 나오는 단칸방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고통을 무릅쓰고 계단을 뛰어내리거나 레일을 타는 마조히즘적인 자세로, 이 새로운 방식의 삶에 내 정신 상태를 맞추기로 결심했다. 차이가 있다면, 보드는 재밌다는 것이다. 난 매 세쉬마다 스케이팅의 고통을 감수했고, 그걸 진심으로 사랑했다. 생각을 좀 비틀어야 했지만, 아무튼 난 이 새로운 길을 마주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고통을 감수하기로 했다. 방법만 다를 뿐, 해야 할 일이었다.

좆같은 곳에서 일을 시작했다. 자존심 죽여가면서 바보들을 상대하고 계속 난감한 일이 생겼다. 조금씩 보통 사회의 일부가 되려고 애썼다.

난 젬병이였다.

직장 회식은 눈살이 찌푸려졌다. 움직이는 차 창밖으로 토한 이야기를 해도 반응이 안 좋았다. 잘난 척하는 놈의 맥주에 참치캔을 부어버렸다가 얻어맞기도 했다. 그래서 조용히 지내기로 결심하고, 내가 지금 속한 것에만 마음을 집중하기로 했다. 배우는 과정이었다.

 

Ali Boulala, Shane Heyl – The Warner crew

 

조금씩 쉬워졌다.

우리는 모두 똑같이 매일매일의 고군분투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다들 아둥바둥하고 있던 것이다. 스케이트보드를 통해 내가 나중에 만난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인생 경험을 했었다. 그게 나와 다른 사람들의 차이를 만들었던 부분이지만, 오히려 그게 자신감이 됐다. 내 과거와 앞으로의 삶이 자랑스러웠다.

가장 불안했던 것은 내 과거, 스케이팅과 나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새로운 삶에서도 계속 그걸 붙잡고 있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 과정을 통해 다시 대학을 가고, 글쓰기를 시작하고, 영어 수업을 듣고, 저널리즘을 전공했다. 그리고 비디오 게임 웹사이트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면서 특이한 꿈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꿈은 내가 어렸을 때 스케이트 파크에서 맞지 않는 큰 팔꿈치 보호대를 차고 있을 때 꾸던 꿈과 같은 것이었다. 다시 스케이트보드 업계로 돌아가고 싶었다. 난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Warner House에서 “가볍게 한 잔” 하고 있을 당시

 

Etnies 릴리즈 파티에서 프리스타일 스케이팅의 전설이자 Sole Technology 마케팅 수석 부사장인 Don Brown한테도 말을 걸 정도로 열심히 알아봤다. 내 오랜 친구 Elissa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Don Brown에게 언젠가 나도 Sole Tech에서 일하게 될 거라고 말을 했다. 사실 준비되어있진 않았지만. 때가 되면 그에게 전화를 한다고 농담도 했다.

난 정말 진지했다.

몇 년이 지나고 나도 성장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기술도 익혔다. 이 모든 변화와 도전을 하는 과정에서도, 스케이트보드를 놓지 않았다.

작년쯤 내가 준비된 것 같았다. Don Brown에서 전화를 했다.

그는 2013년 새해 첫날 Huntington Beach에서 보자고 했다. 난 다시 서부로 이사 가서 스케이트보드의 일부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줬다. 새로 공부한 기술과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설명했다. 그는 내게 조언을 해주고, 내 이력서를 가져가며 계속 연락하자고 했다. 난 Connecticut으로 돌아가서 직장을 때려치고, 모든 물건을 팔고, 두 달 뒤 캘리포니아로 이사 왔다.

 

나, 30살, 대학을 졸업하고, 글을 쓰고, 배우며 비디오 게임 사이트에서 일할 당시

 

한 달이 지나고, Emerica에서 첫날을 맞이했다. 다시 스케이트보드 업계로 돌아와서, 친근감 있는 팀에서 최고의 크루들과 일을 하고 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스케이트보드는 내가 “진짜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는 도구를 줬었다. 그 틈새 문화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날 맡겼던 것이 결국 내가 다른 것을 할 수 있게 준비시켜줬다.

부상당하고, 여행하고, 협상하고, 인내하고, 용기를 갖는 것, 이것들이 내가 보드를 타며 앞으로 갈 수 있게 도와줬던 것들이다. 물론 이것들이 내 이력서에 바로 쓸 수 있는 기술은 아니지만, 필요한 걸 빨리 배울 수 있게 해준 인생의 기술이었다.

좆같은 직업, 어색한 대화, 불안정한 순간들, 가난, 등유 난로, 공부, 글쓰기, 졸업, 그리고 성장. 전부 가치가 있었다. 몇 년 전 스케이팅의 뒷문으로 빠져나갔다가, 다시 정문으로 돌아오는 길을 찾았다.

 


출처: http://www.jenkemmag.com/home/2014/06/05/is-there-life-after-professional-skateboarding/
<IS THERE LIFE AFTER PROFESSIONAL SKATEBOARDING?> 2014. 6. 5.
Words & Photos: Tony DaSilva (@tonydasilva)


 

 

6 thoughts on “스케이터로서 커리어가 끝난 뒤의 삶”

    1. 이런저런 생각이 들더라구
      결국 모든 스케이터가 겪어야만 하는 일인데
      이렇게 자세한 경험담은 들어본 적이 별로 없어서 새롭네
      공감도 가고 글도 잘 쓰고

      그런데 직장을 다니면서 돈을 버는 것만 “진짜 세상”에 속하는 건가?
      거기에만 “진짜 세상”이 있나?라는 반감도 드는 거 있지
      하지만 현실적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이해가 가니까 또…

  1. 분야는 다르지만 비슷한 수순을 겪고 있는 것 같아 매우 이입하며 읽었습니다. 좋은 글 좋은 번역 감사합니다.

땡큐젠켐에게 댓글 남기기 댓글 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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